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전쟁의 전개 (문단 편집) === 포로 === 여기서 잠깐 윌리엄 딘 장군이 [[포로]]가 된 사연을 보자면 여기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기록이 있다. 하나는 월리엄 딘 [[장군]]이 약간의 호위 병력과 함께 피신하다가 전북 부안 산골 민가에서 휴식하던 중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다. 이때 방에 들어가 쉬기 위해 군화를 벗었다가 북한군이 들이닥치자 군화 끈 묶을 시간이 없어서 맨발로 도망치다 잡힌 것인데, 뭐 군화 신었다고 탈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전시와 같이 위급한 상황에서 불과 수분이라도 전쟁 중에는 목숨을 좌우할 수 있으니 방심하지말고 유사시에 대한 대비를 언제나 하고 있어야 한다는 사례로 제시되고는 한다. 다만 이것은 북한의 자료가 딘의 포로됨을 비난하는 글에서 나오는 이야기로서 이상하게 국군 정신교육시간에도 퍼져있는 이야기이다. 일명 복장 단정하자는 것. 60년대 제작된 북한 영화에서는 그런거 없이 그냥 북한군이 몰려오자 철도변에서 찌질대다가 비겁하게 손을 들어주신다. 이 영화에서는 [[채병덕]]도 [[대전광역시|대전]]에서 사살되는 장면이 나오니 고증은 엿바꿔 먹은 작품. 하지만 딘의 회고록인 딘 장군의 이야기나 기타 일반적인 기록은 이와는 다르다. 딘 장군은 후퇴 중 운전병의 실수로 대구로 가는 길이 아닌 전북 부안쪽 길로 접어들어 부대와 분리되어 소수의 병력과 함께 산길로 이동하는 도중 식수를 찾다가 능선에서 굴러떨어졌다. 이때 머리에 자상, 어깨에 골절 등 부상을 입고 기절했고, 같이 있던 병력은 수색을 하다가 포기하고 떠나 대구에 있는 부대와 합류했다. 딘 장군은 중간중간 한국 민간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한 달 간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던 중 전라북도 진안에서 민간인에게 밀고를 받은 북한군에게 결국 포로로 잡혔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딘 장군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한다. 밀고한 사람은 북한군의 치하를 받고 딘이 가지고 있던 [[미국 달러]]와 인민위원회가 보관한 [[쌀]]을 받았으나, 이후에 부역자로 끌려가서 결국엔 총살당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사람이 총살당했다고 하는 건 딘 장군 이야기를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2차 매체로 다룬 70년대말 어린이용 전쟁 실록 계림문고판 한국전쟁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실제로는 [[http://ko.wikipedia.org/wiki/%EC%9C%8C%EB%A6%AC%EC%97%84_F._%EB%94%98|여기서]] 확인할 수 있듯이 딘 소장을 밀고한 자는 전북 진안 운산리의 '한두규' 라는 사람이며, 밀고 과정중 딘소장의 부관을 사살하였다. 그리고 지역 수복 후 체포되어 복역하다가 딘 소장의 감형 탄원으로 출소하였다. 한두규가 밀고한 사유로는 인민군의 현상금을 탐냈다는 설과 전쟁전 반공청년단에 몸담은 전적이 있어 인민군에게 발각시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 자진해서 미국 장성을 넘겼다는 설이 있다. 하지만 본인 말로는 딘을 구하고 같이 가던 중에 [[인민군]]을 만나서 딘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북한군이 후퇴할 때 '''미국의 장군을 넘긴 죄'''를 지은 이 사람은 같이 월북하거나 도망가지도 않고 집에서 잡혔고, 이후 죽을 때까지 자신의 무죄를 항변했다. 이후 북한을 찬양하던 이들이 윌리엄 딘 장군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장성급 포로라는 괴설을 퍼뜨렸는데 사실 [[미국 독립전쟁]] 이래로 꽤 많은 장성급이 포로가 된 예가 많고 당장 2차 대전만 해도 필리핀에서 부대가 통째로 항복하는 바람에 조나단 메이휴 웨인라이트 장군이 포로로 잡힌 일도 있다. 이런 '미국 역사상 최초로 포로로 잡힌 미국장성' 얘기를 퍼뜨린 이들이 무슨 목적으로 그랬는지는 가히 알만하다. 참고로 딘 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는데 그때 그의 [[사고]] 방식은 '''전사하는 것보다도 더 굴욕적인 게 [[포로]]로 잡히는 것'''이었으며, 그가 지휘했던 [[사단(군사)|사단]]은 적에게 잡힌 포로 수가 가장 적은 사단이었다. 그랬던 그가 전쟁 초반에 포로로 잡힌데다가 제24보병사단은 가장 포로로 잡힌 숫자가 많은 사단이 되어버렸다. 딘 장군은, 종전 후 [[1953년]] 9월에 조선인민군 2사단 참모장인 [[리학구]] 총좌와 포로교환되어 미국으로 송환될 때까지 포로로 북한에 억류되었다. 딘 장군과 포로교환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리학구 총좌는 긴 기간동안 괴로워하다가 [[자살]]했다. 전쟁 당시 북한군은 초고속으로 남진하기도 바쁜데 [[포로는 필요 없다|포로가 있으면 귀찮다고]] 다수의 포로들을 FM 소련식으로 두 손을 뒤로 모아 노끈이나 철사줄로 묶은 뒤[* [[임진강 전투]]를 다른 파란 눈의 아리랑이란 자서전을 보면 군용 전화줄도 썼다.] 무릎을 꿇린 후 '''[[총살]]해버렸다.''' 이 주검들은 그대로 길가나 산 속에 방치됐다가 나중에 [[유엔군사령부|유엔군]]이 북진할 때 발견되었다. 총살조차 할 겨를이 없으면, "동무! 이제 곧 조국 통일되는데 왜 도망가시오? 빨리 집으로 돌아가시오!"는 식으로 귀가를 권유하기도 했다. 그래서 항복한 남한군이 집으로 돌아가는 척 하다가 남쪽으로 다시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 실제로 2차대전 극초기 프랑스 전선에서 나치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마구 헤집고 파리까지 달려가자, 프랑스군은 한참 독일군 지나가는거 구경하다가 자신들을 포로로 잡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집으로 갔다. 롬멜도 항복하기 위해 두팔 들고 몰려오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보고 "비켜!"하고 그냥 제치고 지나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국전쟁 초기도 대략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고 보면 될 듯 하다.] 하지만 [[서울대병원 학살사건]]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북한군이 개전초기에도 한국군을 포로로 안 잡은게 아니라 잡히면 '''처형'''한 경우가 더 많았다. 다만 잡힌 포로의 계급이 정말 높을 경우에는 일부러 살려두기도 했는데 여러가지 용도로 써먹기 위해서였다. 딘 장군도 그런 연유로 살아서 포로로 억류되어 있었으며, 실제로도 리학구 총좌와 포로교환이 되었다. 딘이 소장 계급이 아닌 일개 병졸이었더라면 그 자리에서 소련식 총살을 당했을 지도 모른다. 한편 전세가 낙동강에서 고착되자 개전초기 한강철교 폭파로 대량으로 생포한 한국군들을 해방 동무라고 하면서 상당한 인원을 북한군에 편입시켰다. 거의 1개 분대당 2명 비율이었다고 한다. 북한군 기록을 보면 절대 감시하지 않고 알아서 싸우게 했다고 하는데 유사한 맥락으로 봐 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